남북국시대의 歷史적 성격
페이지 정보
작성일 19-06-16 18:14
본문
Download : 남북국시대의 역사적 성격.hwp
,인문사회,레포트
55
설명
레포트/인문사회
3.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된 근거
1) 민족문제와 외교문서
발해의 영역이 고구려의 그것을 대부분 계승하였고, 그 주민들 역시 고구려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왕실의 history는 단절되었다 할지라도, 주민의 history는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순서
발해사의 위치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에 남북국시대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 기술한 리포트입니다. 끝내 두 나라는 대결을 해소하지 못했으며, 발해가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자 발해유민의 상당수는 거란의 협조자가 되어 거란군으로 고려와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남북국의 대립에 관한 기사는 주로 신라와 당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이 기록을 통해 발해의 대결의식도 대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호칭면에서, 신라는 발해를 `흉이(凶夷)`·`말갈발해`등으로 불렀고 [발해]라는 公式(공식) 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잘 불러야 [북국]정도였다. 따라서 우리 history에서 발해가 신라와 같은 위치에서 언급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2) 文化적 측면
文化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발해인들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은 입증이 가능하다. 무력적 대결은 더욱 확실했다. 이 사실은 788년 발해의 문왕이 日本 에 보낸 외교문서에 [고(구)려국왕대흥무언(高(句)麗國王大欽茂言)]이라고 하였다든지, 성씨가 밝혀진 32명의 日本 파견 사신들 중에서 26명이나 고구려의 고씨였다는 점에서 확인되었다. 왕실에 있어서도, 고구려왕실 붕괴(668)후 30년만에 세워진 발해왕실이었지만 그들 스스로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신라가 개성(開城)을 쌓고(713) 북경(北境)에 장성(長城)을 쌓았다든지(721), 패강진(浿江鎭)에 민호를 옮겼던(782) 사건들은 모두 발해를 의식한 군사행동이었다고 해도…(To be continued )
발해사의 위치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에 남북국시대의 歷史적 성격에 상대하여 기술한 리포트입니다. 文化적 보수성이 강한 무덤과 주거양식에서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55 , 남북국시대의 역사적 성격인문사회레포트 ,
Download : 남북국시대의 역사적 성격.hwp( 60 )
남북국시대의 歷史적 성격
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석실분 및 석곽·석관묘를 발해인들도 사용하고 있었는가 하면,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온돌을 발해인들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
신라와 발해는 230여 년간 교섭보다 대결의 시기가 더 길었다.